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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도' 권력이 낳은 비극적 실화(임오화변 설명)

by 주나조아_미국주식,이슈 2024.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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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영화 '사도'

* 영화의 실제 사건 '임오화변' 내용 설명

임오화변은 1762년 7월 4일 사도세자가 노론과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사망한 사건으로 조선 역사상 가장 참혹한 사건 중 하나이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영조와의 갈등과 폭언으로 인해 정신적인 고통을 받았고, 결국 뒤주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영조는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를 엄하게 키우면서도 매우 의심했다. 어린 사도세자는 총명했지만 자라면서 아버지 영조를 크게 두려워했으며, 1749년부터 13년 동안 대리청정을 수행하면서 영조와 많은 갈등을 겪었다. 심한 압박 속에 결국 병을 얻은 사도세자는 궁녀와 궁인을 죽이는 등 비행을 저질렀다. 한창 서로 대립하던 노론과 소론의 싸움에 그의 비행이 이용되었고 나경언에 의해 영조가 알게 되었다. 1762년 5월 13일 영조는 세자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만들고 뒤주 속에 가뒀다. 8일 뒤인 5월 21일 뒤주 속에서 세자가 죽고 영조는 세자의 자리를 회복시키며 사도세자(思悼世子)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후 영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 정조를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하고 1777년 재위한 정조는 자신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선언했다. 이후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장헌세자(莊獻世子)라는 시호를 올렸다.

* 영화 '사도' 줄거리 내용

1737년, 세자는 겨우 3살임에도 불구하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총명함과 슬기로움으로 아버지 영조를 행복하게 만든다. 1749년, 세자의 나이 15살에 영조는 세자에게 자신의 보위를 전위할 뜻을 보인다. 그러나 반대 의견을 내놓는 신하들을 보고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청정하는 것으로 타협한다. 이후 세자는 부왕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영조는 그런 세자의 모습을 보고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지 못할망정 신하들 앞에서 세자를 무시하기 일쑤였고,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자 세자는 영조의 눈치만을 살피며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게 된다. 세자는 그림을 그리거나 무예를 익히는 등 점점 영조의 바람과는 다른 길로 나아갔고 둘 사이에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자 결국 영조는 세자에게 금천교에서 대죄하라는 명을 내린다. 결국 쌓아둔 울분이 터진 세자는 자객들을 이끌고 영조를 죽이러 경희궁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이곳에서 자기의 아들 세손이 영조와 대화하여 공감대를 맞추는 모습을 보고서야 칼을 내려놓는다. 이후 영조는 나랏일이 아닌 아비를 죽이려 한 아들을 처분하는 일이라 말하며 세자에게 자결할 것을 촉구한다. 가만히 생각하던 영조는 기어코 신하들에게 뒤주를 가져와 세자를 넣어 가두라 명한다. 1762년 임오년 7월 10일. 영조와 사도세자는 마침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왕과 세자가 아닌 아버지와 아들로서 진실한 이야기를 나눈다. 사도세자가 죽은 후 뒤주를 연 영조는 오열했고 이후 세자의 신원을 회복시키고 '사도'라는 시호를 내린다. 1776년 마침내 세손이었던 정조가 보위에 오른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무덤에 참배하며 물 한 잔을 올리고 오열한다. 이후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생일날 사도세자가 그린 부채를 들고 그를 추모한다.

* '사도' 감상 후 느낀 점

임금이기에 아버지로서 다가가지 못한 영조와 세자이기에 아들로서 사랑스러운 투정 한 번 부려보지 못한 둘의 관계가 매우 한탄스럽고 마음 아팠다. 영조 자신이 숱한 역경을 이겨내고 겨우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뒤를 이을 아들 세자가 무방비 상태로 그 길에 노출되지 않게 엄격하게라도 교육하려 했던 영조의 태도도 어떻게 보면 아버지의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 사도세자의 죽음 직전 뒤주 앞에서 영조와 사도세자가 비로소 애정이 어린 말들을 나누는 것을 보고 정말 그 오랜 기간 쌓여있던 갈등이 결국은 서로를 사랑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비추는 말 몇 마디면 눈 녹듯 녹아 없어지는데 그러지 못한 둘의 운명이 참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실제 역사로는 이런 말을 나눴다는 정보도 없고 '사도'라는 시호 역시 영화 속뜻이 아니라는 것이 조금 충격적이지만 그래도 영조는 임금이기 전에 아버지로서 세자를 사랑했고 세자 역시 자신을 보고 웃어주던 그런 아버지를 사랑했을 것이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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